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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고고학에서의 비전문가의 활약

루니투니 2021. 5. 10. 17:36

고고학에서 비전문가였던 슐리만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독일 학술계를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전문가들의 시가와 질투 때문이지요.

슐리만의 업적을 평가절하하는 고고학계

혁명의 급속한 진전과 축적된 업적, 막연한 슐리만의 이미지, 그리고 선전적인 출판물은 독일 학술계를 중심으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소동의 정도는 실리만의 시기로 트로이와 호메로스에 관한 90권의 출판물이 학자들의 손에 의해 차례차례 출판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격렬한 공격의 화살은 최초로 그의 아마추어 예술에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고고학적 발굴의 역사 속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미지의 세계에 새로운 비약을 도전으로 그들은 외부인의 순수한 의지를 짓밟는 학자들입니다. 슐리만에 대한 공격은 도덕적인 견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 시점에서 몇 가지 말을 인용해서 적절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철학자 아서 쇼펜하우어에게 목소리를 들려드릴게요. 쇼펜하우어는 이 공격 때문에 화가 나 있었습니다.
"아마추어 좋아하는군요!" 학문이나 예술로부터 사랑과 기쁨을 얻고, 먹고 사는 수단으로만 종사하는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당하기 때문에, 사물을 아는 것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이러한 분야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제목입니다. 빈곤, 굶주림, 탐욕 때문에 매달리는 사람 이외의 무엇에도 진지하게 임할 수 없다는 비열한 신념에 근거하는 경멸입니다. 일반 대중들도 마찬가지 의견이기 때문에 전문가는 진심으로 존경하고 예술 애호가는 불신하는 거죠. 하지만 실제로는 예술 애호가의 목표 그 자체와 프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수단이거든요. 근데 뭔가를 좋아해서요 애정을 가지고 그것을 하는 사람은 아주 진지하게 임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돈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보다 더 큰 성과를 올리고 있습니다.
독일에서 슐리만의 편을 든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자 협력자이자 고문이자 친구인 빌헬름 뒤르펠트 교수는 1932년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나 많은 학자, 특히 독일의 언어학자들이 트로이와 이타카에서 그의 작품에 가해진 경멸과 비웃음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호메로스의 유골 중 몇 구가 말입니까? 아직도 비웃음을 받고 있을 때죠. 그들의 조소는 안타깝고 부당해 보일 뿐만 아니라 사실은 비과학적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외부 성공에 대한 전문가들의 불신은 범죄자의 천재에 대한 불신감입니다. 마틴 루서는 남자가 없는 길을 규칙적인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세상 그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는 사람들을 은근히 경멸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에선 범죄자 대부분이 정권을 잡고 있습니다.

학문의 역사에서의 비전문가의 활약

학문의 역사를 통해서 독학이나 전문적인 훈련, 프로의 신호등에 의해서 많은 훌륭한 발견이 되고 있습니다. 예술 애호가나 아마추어, 외부인이 전통적인 학문의 장해를 간단하게 극복할 수 있습니다.
17세기 독일의 위대한 물리학자 오토 폰 게리케는 전문 법학자였습니다. 18세기 증기 기관 개발의 선구자 데니스 파판은 의사였습니다. 비누 제조사의 아들 벤저민 프랭클린은 위대한 정치가일 뿐만 아니라 저명한 과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대학교육도 받고 있었습니다. 윌헬름 오스트왈드의 ‘전기화학사’에 따르면 전기의 발견자인 루이지 갈버니도 이 분야의 지식 부족 때문에 전기를 발견했습니다. 저자는 플라운퍼 또한 이 분야의 지식 부족 때문에 전기를 발견했습니다. 스펙트럼에 관한 뛰어난 책인 루이지 갈버니도, 프라운퍼, 그리고 한 저자는 이 분야의 지식 부족 때문에 전기를 발견했습니다. 마이클 패러데이는 대장장이의 아들로 서점의 견습으로 거의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줄리어스 로버트 메이어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발견했는데 물리학자가 아니라 헤르만 폰 헬름홀츠라는 또 다른 의사가 26살 때 같은 주제에 관한 최초의 책을 출판했습니다. 전신을 최초로 설치한 것은 해부학의 토마스 거멀링 교수였습니다. 나열을 하자면 이 목록에는 끝이 없어요. 이 사람들과 그들의 업적이 학문 발전의 과정에서 제거된다면 구조 전체가 붕괴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프로들에게 경멸 당하고 비웃음 당해야만 했습니다.
고고학에는 그런 비전문가들의 명단과 부수적인 규율이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의 최초의 우수한 번역자인 윌리엄 존스는 아시아의 학자가 아니라 벵골의 대사였습니다. 최초로 쐐기문자를 해독했던 그로테펜트는 고전언어학자이고 후계자인 롤린슨은 군인이며 정치지도자였습니다. 의사 토마스 영은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해독하기 위해 최초로 긴 여행을 했습니다. 결국은 이 연구를 완성시켰습니다.
전문가가 그런 일을 이룬다면 그 가치를 논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전문가들이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중요한 것은 결과라고 말할 때, 우리는 특히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실리만이 최초 발굴과정에서 몇 가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보존되었어야 할 고대의 건물을 헐고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는 벽을 허물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독일의 역사가 에드워드 마이어는 말했습니다.
“슐리만이 폐허에서 최하층까지 곧장 나아가는 과정은 학습에 아주 효과적이었어요. 구릉지대에 묻혀있는 오래된 층을 좀 더 조직적인 방법으로 발굴했습니다. 트로이 목마문화로 현재 어떻게 여겨지는지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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